'일을 잘 하는 것'과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때로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을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어차피 세상에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객관적이라 인식하는 무언가는 '상호 주관성' 즉 서로간의 동의에 근거한 것들이다. 때문에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질적으로 '일을 잘 하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기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A는 일을 1분에 하나씩 처리하고 B는 2분에 하나씩 처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인식되기로는 되려 B가 A보다 빠르게 느껴진다면? 이 경우 실질적으로 살아남는 쪽은 B가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가 외부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내부에서 발생할 경우는 큰 문제가 된다. 내부에서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인식될 때 그것은 그룹 씽킹으로 흐르게 되고 모든 문제는 정당화된다. 엔론은 끊임없이 회계를 조작하면서도 이에 대한 일말의 문제를 느끼지 못했고 이는 결국 미국 내 주가 10대 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를 찾아내기 앞서 정당화의 기제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데 이러한 공유는 책임을 분산시킬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조차도 강화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땜질이다. 외부와의 관계에서 땜질은 들통나지 않으면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 적어도 포장력이라도 늘 것이다 - 들통난다면 이를 보완할 계기가 된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땜질은 답이 없다. 땜질한 부위가 드러나도 어느 새 다른 누군가가 다시금 땜질을 하고, 또 드러나면 또다른 누군가가 땜질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문제가 없다고 축전을 벌이고, 문제가 없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또 다른 땜질을 연구한다. 결국 내부 구성원들은 '일을 잘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밖에서는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조차' 않는다. 잘 버텨봐야 땜질이 벗겨지는 순간 그 안에 들어찬 문제들은 더욱 흉하게 보이며 고여 있던 냄새는 진동할 것이다.



이성적 인간다운 조직

학습은 배울 學과 익힐 習으로 이루어진다. 공자께서도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學과 習이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배움은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며 익힘은 이것을 반복하여 몸에 익게 하는 것이다. 

공자는 왜 배움과 익힘을 굳이 가르고서 또한 그것을 함께 이야기했을까? 아마도 이 둘이 떨어짐은 너무나 무의미함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배움은 익힘을 낳고 익힘은 또한 배움을 낳는다. 이는 돈오와 점수의 관계로도 볼 수 있는데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서야 다시금 꾸준한 수양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학습'이라는 개념은 조직 사회에서 너무나도 어이 없게 남용되고 있다.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미명하에 과업 수행이 미숙함이 그 구성원의 학습 능력 부족으로 귀인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너무도 큰 착각인데 '학습'은 '의식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뒤따르지 않는 무의미한 반복은 '이성'에 근거한 인간적 영역보다는 체득한 프로세스를 그대로 따르는 '동물'의 영역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일정 정도의 반복을 통한 '체득' 역시 중요하지만 이 역시 '의식적 활동'을 전제로 할 때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의식적 활동'에는 반드시 '자기 통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의식적 활동이 창출되기 힘들고 자연히 학습보다는 단순 반복 작업으로 이어진다. 즉 조직이 구성원에게 자기 통제권 - 위임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 을 주지 않는 한, 즉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면 학습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신뢰, 자기 통제 권한 부여, 위임... 이 모든 단어는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인간만의 영역'을 가진 조직만이 학습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인간다움'이란 단지 정감 있고 따뜻한 감성의 수준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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